"세계 최고의 반도체 공정장비를 만들어도 국내 두 반도체 기업에 모두 납품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내 것이냐, 네 것이냐를 따진다면 진정한 1등의 문화를 뿌리내릴 수 없을 겁니다."(반도체 장비 제조 A사 사장)
"국내 두 반도체 제조사는 해외 반도체 경쟁사와는 전략적 제휴를 잘 하면서, 정작 국내 기업 간에는 협력하기 매우 꺼립니다. 서로의 이윤에 필요하고 또 그것이 국익에 맞는다면 적극적인 국내 기업간 협력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죠." (국내 A대학 전자공학부 B교수)
지난달 14일과 15일. 국내 전자업계를 대표하면서도 치열한 경쟁 관계로 서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전례없는 협력 내용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4일에는 두 기업이 각각 내세웠던 북미 모바일TV 표준규격을 하나로 통합해 세계 표준화한다는 협력 계약을 체결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15일에는 두 기업이 LCD패널 공급부족에 따라 각각 대만에서 일부 수입하던 것과 함께 두 회사간 교차 구매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또 두 회사를 주축으로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연구센터'를 설립해 공동 R&D를 실시하고, 디지털노광기 등 핵심장비 및 부품 6종과 광학필름 등 핵심 소재 5종에 대해서도 역시 공동 개발하는데 손을 잡았다. 이와 함께 7세대 이하 LCD장비에 이어 8세대 장비 분야에서도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각사의 협력 장비회사간 교차 구매를 확대키로 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국내 이웃 기업의 성공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보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사사건건 대립하기 일쑤인 국내 기업문화가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이번 두 협력 사례는 이같은 스테레오타입을 깨기 충분했다는 평가다.
국내 IT수출의 3대 주력 산업은 디스플레이, 통신(휴대폰), 반도체다. 디스플레이와 통신 부문에서 아직 미흡하긴 하지만 국내 대기업간, 대중소 기업간 협력이 물꼬를 텄다. 그러나 시야를 반도체로 돌려보면 협력 사례를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반도체 대-대 협력 실종=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 두 회사간에 기술협력, 협력 장비회사간 교차 구매 등 LCD 분야의 협력과 같은 사례는 거의 없다. 물론 올 초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차세대 메모리인 STT램 관련 정부 연구과제에서 협력키로 했다고 발표했지만, `짝꿍하기 싫다'는 어린이를 억지로 끌어 한 자리에 앉혀놓은 셈이라는 게 이번 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관계자의 설명이다.
메모리 표준화에서도 두 기업은 따로 논다. D램 표준화 분야에서는 JEDEC(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을 중심으로 삼성이 주도한 채 하이닉스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낸드플래시에서는 특별한 국제표준화기구가 없는 가운데 삼성-도시바가 제휴를 맺고 있고, 하이닉스는 인텔?마이크론?소니 등과 ONFI(Open NandFlash Interface)라는 연합체로 묶인 채 제각각 활동하고 있다. 서로 해외 경쟁사하고만 협력하고 있는 셈이다.
한달 전 하이닉스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를 통해 삼성전자측에 `원낸드' 협력을 제안했다. 삼성전자가 2004년 독자적으로 낸드와 S램 등을 결합해 개발한 원낸드는 인텔 등의 노어플래시 진영을 위축시키며, 낸드플래시가 시장의 대세로 자리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낸드플래시 세계 2위인 도시바에 원낸드 라이선스를 제공하며, 낸드 진영의 돈독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ST마이크로에도 원낸드 라이선스를 제공한 바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 3위인 하이닉스는 고부가가치 메모리제품인 원낸드의 기술 라이선스를 해외 기업만이 아니라 국내 하이닉스에도 제공해달라는 의사를 삼성측에 전달했지만, 한달이 지나도 삼성의 답변을 듣지 못했다. 삼성전자 내부의 반대 의견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반도체 대-중소 상생 부실= 2006년 당시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시절, 정부 주도로 제시됐던 `반도체 장비재료 성능평가팹 사업'과 `나노반도체장비 원천기술 상용화 사업'이 반도체 부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 사례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성능평가팹 사업은 국내 중소 반도체 장비 및 재료기업들이 삼성전자, 하이닉스, 동부하이텍 등 반도체 제조사의 양산라인에 자신들이 개발한 장비와 재료를 투입해 품질 평가를 받고 제조사가 인증서를 발행해주는 사업으로 지난해부터 시작해 사례가 많진 않지만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나노반도체장비 사업은 삼성?하이닉스를 비롯해 국내 장비기업들이 참여해 지난해부터 오는 2011년까지 45∼22나노급 식각?증착?검사 등의 장비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처럼 정부 과제에선 협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민간기업 주도의 협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장비 업계가 내심 바라는 것은 LCD장비 교차구매처럼 반도체 장비 교차구매가 활성화되는 것이지만, 이런 분위기는 반도체 업계에선 감지되지 않는다.
"찍히면 죽는데, 누가 함부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겠습니까? 가뜩이나 반도체 장비 시장이 좋지 않은데, 두 회사 모두 공급하려다 한 회사도 공급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한 반도체 장비제조사 사장의 말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